이동근의 부친 이석구는 생계를 위하여 부사관에 지원한 후 신혜숙과 결혼하여 가족을 먹여 살렸다.
이석구는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부사관에 지원하였기 때문에 가진 자본이 없었다.
따라서 80년대에는 셋방살이를 전전하였다.
이동근은 처음 파주군 문산읍 선유리 산 72번지에서 출생등록이 되었다.
이후 84년 부터 86년에는 대자리에서 살았다. 벽제읍 대자리에서 살 때에는 지금은 프랜차이즈가 된 유명 갈비집1) 근처에 셋방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유명한 갈비집은 사람을 차별하여, 차를 타고 입장하지 않으면 식당에 입장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86년 금촌으로 이사하여 금촌역 뒤편 새말에 위치한 협신주택에 89년까지 살았다.
이동근의 대학시절은 절망의 연속이었다.
경찰대학에는 소위 “싸이코패스”라는 작자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싸이코패스”들은 천재성을 가진 이동근을 매울 싫어하였다.
다만 이동근은 대학시절 꽃미남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
다음 사진은 대학 4학년 시절의 사진이다.
드디어 이동근 인내의 시간을 견디고는 경찰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경찰대학생들을 싫어하던 노무현 정권의 기득권 적폐세력은 경찰대학생을 매우 싫어했다. 이에 노무현 정권시절 똑똑한 수많은 우민화와 박해가 있었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던 이동근은 끝까지 참을 수 밖에 없었고, 드디어 오래된 독재와 인권침해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게 되었다.
이동근은 2007년 수사서류 작성 지원시스템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전국의 경찰관들이 큰 도움을 받았다.
삼일교회 시절 이동근이 너무 똑똑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시기 질투를 했다.